언론보도

[중기이코노미] 암진단 보험금도 회사로 들어가 눈 녹듯 사라져

작성자
회생희망센터
작성일
2020-04-13 15:02
조회
1556

암진단 보험금도 회사로 들어가 눈 녹듯 사라져

[재기도전 중소기업인 수기] ⑥자금없이 열정만 갖고 불살랐지만

재기도전 중소기업인들의 익명 수기

중소기업의 5년 생존율이 28.5%에 불과하다. 적지 않은 중소기업인이 한번쯤 사업에 실패하지만, 한번의 실패가 있다고 해서 내일의 해가 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좌절을 겪은 중소기업인들을 지원하는 법무법인 도담에서, 중소기업인들(익명) 자신의 경험을 직접 담은 수기를 모았다. [편집자주]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같이 정리해고를 당했던 멤버들과 함께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모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핑크빛 꿈을 꾸면서, 나는 두근거렸던 것 같다. 잘될 것만 같았다. 나름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멤버들의 모임이었고, 나에게는 확실한 기획과 로드맵이 있었다. 얘기를 할수록 희망이 생겼고 우리는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소요자금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창업멤버들 중 유일한 청년인 내가 대표가 되다

누가 대표를 할것인가, 토론 끝에 멤버들 중에 제일 어렸던 내가 대표가 됐다. 당시 중소기업진흥공단에는 청년창업자금이라는, 예비창업자를 위한 저금리 창업자금 대출사업이 있었고 멤버들 중 내가 유일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자금에 대한 논의의 끝이었다. 1억원으로 되는데 까지 해보고 안 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 다시 취직을 하자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그 1억원은 갚아야 할 돈인데…. 실패하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성공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도 탈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서였던 것같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초기 자본금을 마련해 법인의 대표로 등기에 기재가 되고, 창업자금 대출의 연대보증을 서고, 대표 명함을 받아 들고 나니, 멤버들 중에 제일 어린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고 내가 모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회사는 나였고, 내 결정과 내 노력이 회사였다.

 

그리고 그 1억원으로 나는 급여를 가져가지 못하고 매달 멤버들의 급여를 주면서 깨달았다. 결국 이 모든 책임은 내게 돌아오겠구나.

보험금까지 사업에 올인했지만, 상환일 도래

나도 정말 열심히 했고, 멤버들도 정말 열심히 해줬다. 하지만 열심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회사는 언제나 자금이 문제였다. 자금이 더 필요할 때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늘 내 몫이었다.

그즈음 내가 암 진단을 받았는데, 암 진단금으로 받은 5000만원의 보험금 역시 회사로 들어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내 생명을 녹여 사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정말 많이 힘들었다. 항암치료는 매우 버거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쉴 새 없이 일하던 탓에 녹아버린 진단금처럼 나도 녹아 없어져버리고 싶었다. 앞으로 만약 암이 재발 한다 해도 치료를 계속할 돈도 이미 사라졌고, 사업은 아직 이렇다 할 결실을 내고 있지 못하고 있었고, 내 앞으로는 연대보증으로 생긴 1억원의 빚과 카드론이 있었다.

남편은 잘 해줬다. 창업멤버였고 그 전부터 연인관계였던 남편과는 암 발견과 동시에 결혼하게 됐다. 당연하지만 우리의 사정상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갈 수 없었다. 의사가 결혼하고 서류를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하면서 ‘결혼하실거죠?’ 라고 한 질문이 우리의 주례였고, ‘필요하면 해야죠’ 라는 우리의 대답이 혼인서약이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때는 그 정도로 희망이 없었던 상황도 아니었다.

창업 2년차가 되면서 억지로나마 용역매출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매출도 슬슬 나기 시작했고, 무리를 좀 했지만 초기 멤버 외에 2명의 직원을 더 고용했을 정도로 회사는 나름의 성장기였다. 우리 회사의 개발품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직접 우리 회사를 수소문해서 바이어가 찾아와 수출계약도 했고 소량이지만 수출도 했다.

 

그 약간의 매출에 비해 인건비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내가 끌어올 수 있는 빚을 다 끌어오고, 남편이 끌어올 수 있는 빚을 다 끌어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약간의 매출과 우리가 가진 전부로 빚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한 달 한 달을 버텼다.
거치기간이 2년이었던 중진공 자금 1억원의 상환일이 도래했다. 회사는 창업 3년차의, 소위 데스밸리 구간에 진입해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자금을 대출받은 회사들이 견디다 못해 하나둘 폐업을 했고, 알고 지내던 대표들도 하나둘 연락이 두절됐다. 시골에 돌아가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모님의 집을 팔아 해결하고 어딘가에 취직했다는 대표도 있었고, 정말 한강에서 소주를 마시며 내게 작별 전화를 한 대표도 있었다(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부모를 부양하고 있었기에 빚을 해결해줄 부모도, 재산도 없었다.

창업자금 1억원의 상환금은 한달에 350여만원 남짓이었다. 사업하면서 그 정도의 돈은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 당시 그 돈은 한 달에 3억원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을 쏟아서 성장을 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상환이 시작된다는 것은 결국 직원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였고 직원을 줄인다는 것은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미 직원 급여에 허덕이던 회사는 창업멤버를 제외한 직원들을 정리해고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결국 매출이 줄어 연체가 시작됐다. 같이 창업한 멤버 중 남편을 뺀 모두가 이 시기를 참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남편과 둘만 덩그러니 남았던 첫날, 우리는 출근해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암 진단을 받고 망연자실했던 그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그 해 내 카드와 회사만 겨우 살리고, 남편은 빚을 해결하지 못해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됐다. 집을 팔아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남은 돈 일부는 변제에, 일부는 회사의 연체를 해결하는데 사용했다. 중진공의 1년 상환유예기간 적용으로 이때 조금 한숨을 돌렸다. 개발제품은 조금씩 매출이 났고, 나와 남편은 정말 밤낮없이 일했고, 조금씩 내 개인 빚도 갚을 수 있었다. 돌려막기나 리볼빙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직원도 고용할 수 있었고, 나름 매출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망보험금으로 변제…파산, 다시 희망을 노래하다

정말 힘들어진 것은 그 다음해인 2018년이었다. 상환유예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엄마의 죽음으로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던 시기였다. 나는 아주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사람과 만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일어나 밀린 일을 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잠을 잔다고는 하지만 도통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낮밤이 뒤바뀐 생활은 과로 위에 과로를 쌓는 꼴이었다.

남편은 그즈음 하루 4시간만 겨우 쪽잠을 자면서 버텼다. 건강은 나빠졌지만 쉴 수 없었다. 무리를 하면서 어찌저찌 한 달 씩을 버텨갔는데, 매달 일정한 매출을 일으켜주던 거래처가 우리와 함께 하는 사업을 2018년 말 접으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2019년부터 4대보험과 중진공 대출금의 연체가 시작됐다. 4월부터는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다. 엄마의 사망보험금을 변제에 사용하면서 울었다. 6월에는 스트레스로 마치 뇌졸중처럼 몸의 한쪽과 혀가 마비되는 증상을 겪어 응급실에 실려 갔다. 여러 검사를 한 결과 특별한 원인이 없고, 아마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스트레스가 결국 몸으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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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뿐이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인정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희망이 생겼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페이스북에서 회생이나 파산에 대한 이야기를 본 것은 한참 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까지 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극단적 상황에 대한 상상으로 괴로워했다. 생각의 순환 고리에 빠져서 탈출할 생각을 전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이런 내 상황을 친구에게 털어놓자 나도 잘 아는 대학 선배인 변호사를 소개했다.

잠시 전화로 통화한 뒤,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상담예약을 잡아 구체적인 상담을 받고는 파산을 결정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미 빚을 빚으로 막는 실질적 파산 상태였는데, 안 되는 것을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뿐이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인정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희망이 생겼다. 난 실패했구나, 때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도 있구나, 난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구나. 상담을 마치고 우리를 배웅하면서 오늘이 인생에서 제일 힘든 날일 거라며, 아직 젊은데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선배 변호사의 얘기에 눈물이 날 뻔 했다.

우리 부부는 법무법인 건물 1층에 있는 프랜차이즈 찻집에 가서, 평소엔 감히 엄두도 못 냈던 흑당 버블티를 주문해 마셨다. 우리의 삶도 언젠간 이렇게 달콤해지기를.

나는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파산절차를 진행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를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생겼다. 파산을 결정하고 상담을 받고 온 그날 우리 부부는 아주 오랜만에 아주아주 긴 잠을 잤다. 불안에 떨며 극단적인 생각을 하던 불면의 밤을 이제서야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됐고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전화가 오면 깜짝깜짝 놀라던 지난날 대신, 언젠가는 전화벨이 울리면 반가워질 날이 있을 것만 같다. 한 번의 실패. 물론 아주 거창한 한 번의 실패였지만 실패한 모두가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님을 조금씩 깨닫는다.

두손 다 들고도 살아갈 수 없을 때, 사회가 안아야

지난 6년은 정말 활활 타오르며 열정을 불사르던 시절이었고, 지금 비록 하얗게 재만 남아버렸지만 그 재 속에서 나는 어제의 실패를 되돌아보며 내일의 성공을 다시 꿈꿀 수 있게 됐다. 그동안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재능과 지식, 그리고 기술은 고스란히 내게 남았고 실패했을지언정 정말 열심히, 부지런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나에 대한 긍지와 때로는 실패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교훈도 남았다. 나는 손에 남은 재산이 아닌, 아무도 가져갈 수 없는 그 무형의 자산으로 다시금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남편과 나는 우리 둘 다 재능이 있다 못해 너무 많아 도대체 뭘 골라서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일 만큼이 있고 부지런한데, 조금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 어디가서 설거지를 해도 우리 두 사람 못 먹고 살겠냐며 킬킬거릴 수도 있게 됐다. 그리고 둘이 함께 했고 둘 다 모든 것을 불살랐기에 결정적으로 우리에겐 서로가 남았다. 같이 울었고, 이제 부둥켜안고 그 동안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서로가.

어떤 이는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지 그렇게 두 손을 들면 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방법이 없을 때, 빈 두 손을 다 들고도 살아갈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 그보다 정말 열심히 했다가 실패한 사람을 안아줘야 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창업을 하고 직원을 고용하고 월급을 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가져가는 것도 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투입해 밤낮없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수가 많지 않고, 저성장시대에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를 극복하고 나면, 나는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다시 또 열정을 불사를 것이기 때문이다. [제공=중기이코노미 객원 김남주 대표변호사(법무법인 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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